(폄)
"가진 자들의 가면"
내가 법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것은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TV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완고하지만 강직한 킹스필드 교수와 두꺼운 안경 안쪽에서 두 눈을 번뜩이며, 진실을 찾기 위해 고뇌하던 법대생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법을 배우게 되면 무언가 잡히지 않고 막연하기만 했던 삶의 진실, 사회 정의를 실현시키는 방법을 찾게 될 줄 알았다.
인간사회의 무수한 갈등을 공정한 저울로 달고 재서 정확하게 계량해 주는 역할을 법이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말랑말랑한 생각은 익지 않은 계란 깨지듯 쉽게 깨졌다.
학과 선배들은 ‘한반도는 무법천지’라는 과 티를 입고 다녔고, 입학한 지 2달이 채 되지 않아 동갑내기 강경대라는 아이가 경찰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강의실보다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리거리 곳곳에 숨은 불법은 수상쩍게 그 불공정함을 자주 드러냈다. 불공정 뒤편에 법이 가진 속성이 있다는 것을, 법은 가진 자들의 가면이고 무기라는 것을, 법은 집행하는 자들만의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시 내가 느꼈던 무력감과 배신감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미워해 본적 없던 나이에, 나는 국가를 향해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 법원과 검찰이 내린 두 개의 결정이 있었다.
하나는 신세계 이마트 수지분회 노조원들에 대해 사측이 낸 ‘업무방해금지가처분 신청’에 대해 법원이 낸 결정이었다.
이마트 조합원들이 회사 앞에서 집회를 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을 통해서‘신세계 이마트는 무노조 경영이념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할 때마다 회당 50만원씩 사측에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신문 또는 잡지, 인터넷 등에도 이와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되며, 매장 100M 이내에서 현수막, 피켓, 유인물 등을 나눠줄 수도 없다고 아주 상세하게 명령하고 있다.
하나는 삼성SDI 노동자 강재민이 사측을 부당노동행위로 고소한 것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이다.
사측의 취업규칙에 나와 있는 대로 해석하더라도 강재민에 대한 회사측의 업무전환배치는 부당노동행위임이 당연했고, 강재민을 미행하고 괴롭혔던 회사 관계자들에 대한 녹취사실은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물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서는 수원지방노동사무소가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직권기소 검토 중이던 것을 혐의 없음으로 수사 지휘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법원과 검찰이 법을 가지고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 거야. 정말.
신세계 이마트와 관련된 사건에서 법원은 사회적 약자들의 표현 자유와 최소한의 권리보장을 위한 법적 보호 장치를 없애버렸다.
그러니까 법원은 신세계 이마트라는 회사와 4명의 여성노동자들이 같은 사회적 지위와 법적 권리관계를 가졌으므로 쌍방 간의 이익관계를 따진 것이고, 결론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의 인권보다 회사 측의 영업이익이 더 크다는 것으로 끝을 낸 것이다. 다시한번 빌어먹을!
그리고 삼성SDI 강재민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위법한 사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자신만이 아는 융통성(또는 검찰이라면 누구나 숙지해야할 융통성)을 발휘해서 세계일류기업 삼성 그룹의 무노조 경영에 도전한 일개 노동자가 아무리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이를 구제할 법은 없다고 엄숙히 경고해 준 것이다.
강재민은 그 유명한 삼성그룹 핸드폰 위치 추적 사건으로 회사 대표이사를 검찰에 고소했던 사람이다.
그는 이후로 끝없는 회유와 협박, 미행, 자신의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부서로 전환 배치, 결국 수 십 년 간 일해 온 회사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그 장본인이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검찰 발표를 기대하고 있던 강재민씨는 더 이상 법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건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신세계 이마트 여성 노동자 4명과 삼성SDI 강재민 사건은 내 마음에 묵어왔던 불신을 들추어냈다. 법이란 가진 자들의 페르소나, 가면임이 확실하다.
법원과 검찰,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린하도록 법전을 들춘다. 그들에게 정의는 없다. 그들에게 있는 지혜는 누가 힘을 가진 자인지, 누가 자신들의 지위를 영속화 시켜줄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영리함뿐이다.
하지만 더욱 뚜렷해 진 것은 있다.
진실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 진실은 결국 법원이나 검찰에 없다는 것. 그것은 민중들 속에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다는 것. 결국 가장 밝은 빛은 가장 어두운 밤중에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으나 희망이 있는 사람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가 간다.
이밝은진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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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근
가진자들의 가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