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인지 가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금방 갔다 올게"
지난 10월 24일 아침. 당신은 이 말만 겨우 남기고 손목엔 차가운 수갑을 찬 채 7~8명의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어 갔고 남아있던 여덟 명의 수사관들은 곧바로 압수 수색에 들어갔습니다.
두 시간이 넘게 집안 곳곳을 뒤져서는 아이들이 쓰던 컴퓨터, 노트북, 책, 통장 등을 포함하여 몇 박스를 가져갔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생전 처음 당한 일이라 그 당시에는 수색영장을 보여 달라는 말도 저항 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사인하라는 곳에 사인을 했고 수사관 들이 우리의 소중한 물건을 가져갈 때도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도 저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냥 앉아 있어야 했답니다. 그저 앞이 막막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 쯤 지난 후에 겨우 정신을 차려 처음으로 전화한 곳이 민주노동당 마포구 위원회였고 위원장님과 부위원장님은 그날 오후 국정원까지 면회를 함께 가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서초경찰서 유치장과 국정원을 오가며 했던 20일에 걸친 국정원 조사, 뒤이어 한 달에 걸친 검찰 조사까지. 당신이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구속된 지 벌써 50일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구속되던 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상황은 아무것도 없는데 시간은 무심하게 참 빨리도 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당신이 곁에 없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우리 부부가 함께 했던 지난날 들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우리가 만나서 처음으로 손잡고 걸었던 따뜻했던 봄날의 팔달산 공원도, 여름이면 자주 찾던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던 서해안의 작은 해수욕장도, 여름엔 시야를 가려서 답답하다며 미움을 받다가도 가을이면 마치 화해라도 하자는 듯 화려한 색감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던 창밖의 단풍나무도 동네를 한 바퀴 돈 후에 항상 마지막에 들르던 놀이터의 키 작은 그네도... 이들 모두가 우리에겐 더 없는 친구이자 동지였지요.
어쩌다 일이 안 풀리거나 답답한 일이 있을 때 찾아가면 우리의 힘든 마음을 다 받아 주었고, 심심할 때 찾아가면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고 작은 다툼이라도 있을 때는 우리를 화해시켜주던 친구들이었지요.
당신은 아이들한테도 참 좋은 아빠였어요.
아이들이 잠이 들면 얼마 후에 꼭 다시 가서 이불은 제대로 덮고 자는지 창문은 열려있지 않은지 베개는 제대로 베고 자는지 확인해 주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문혁이 하고는 목마도 태워주고 장난도 치고 잘 놀아주는 재미있는 아빠였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진혁이 하고는 책에 관한 이야기부터 위인에 대해 역사에 대해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이 대화해 주는 자상한 아빠였습니다. 엄마인 나보다도 더 세심하게 말이지요.
이런 당신에게 어느 날 갑자기 ‘간첩’ 이라는 멍에를 씌워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나와 아이들을 졸지에 간첩의 아내와 아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가족을 그야말로 한순간에 이 땅에서 같이 살아서는 안 될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지난 11월 2일, 국정원의 일방적인 수사와 보수언론들의 여론몰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구속자 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중의소리
바로 김승규 전 국정원장이 말입니다. 시작은 비록 전 국정원장이 하였으나 그 다음부터는 수사와 재판결과를 지켜보는 신중함은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서로 앞을 다투어 왜곡보도와 추측보도를 했고 그 속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TV뉴스 시간마다 어김없이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아빠를 보아야만 했고 매일아침 배달되어 오는 신문에선 간첩으로 낙인찍힌 아빠의 사진을 보아야 했으니까요. 혹여라도 친구들에게 간첩의 아들이라는 것이 알려져 따돌림이라도 당할까봐 불안 해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빠에 대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버티어 주는 아이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오히려 엄마인 나를 걱정하며 위로해 주는 큰 아이 는 마치 당신이 내 옆에 있는 듯 힘이 되고 위안이 됩니다.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회사에 나가 일하랴 구치소에 면회 다니랴 너무 힘들겠다며 밑반찬 이며 깍두기를 담가다 주는 인이 엄마도 있고, 지금까지도 매일 신문에서 관련기사를 모아주는 내 친구 찬애, 그리고 힘 들 텐데 택시타고 다니라며 주머닛돈 까지 챙겨주는 태훈이 엄마, 시간만 나면 전화해서 나를 웃게 해주는 주영이 엄마, 힘내라는 문자까지 보내 주시는 팔순을 바라보시는 아버님,.....
모두가 우리를 걱정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압수수색이다 뭐다 해서 어수선한 회사 분위기 속에서도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해주고 면회까지 와 주는 직원들도 있지요. 그 뿐 인가요? 구속 이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면회 와 주는 당원 동지들과 당 대책위 관계자 분들 덕분에 힘이 빠질 새가 없답니다.
여보, 며칠 전 검찰에서 당신을 포함한 다섯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어떤 법입니까?
국가보안법은 이미 유엔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반 인권적인 악법 이라며 폐지하라는 권고를 수없이 받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악법중의 악법이 아니던가요? 어떻게 자기와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고 하여 상대방을 처벌하고 감옥에 가두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고통을 줄 수가 있답니까? 내 마음과 생각을 내 마음대로 먹지 못하게 하고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세상 어디에 또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언젠가 말했었지요. ‘자신의 사상과 신념대로 살 수 없는 세상은 이미 풀 한 포기조차 자랄 수 없는 메마른 황무지나 마찬가지’ 라고요. 지금 우리나라가 그 황무지와 다를 바 없다고, 당신은 그런 황무지에 물을 끌어 들이고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을 만들고 싶다고요. 그러기 위해선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이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당신이 그 국가보안법에 의해 구속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분단된 조국을 물려주고 싶지 않기 위해, 통일된 나라에서 전쟁의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아 나갈 다음 세대를 위해 정당 활동을 열심히 한 것밖에 없는데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둥 보고를 했다는 둥 하며 국가보안법의 굴레에다 ‘간첩’ 이라는 누명까지 씌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저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의해서 말입니다.
북한은 분명 우리 한반도에 같이 살고 있는 한 민족이며, 우리와 같은 말과 같은 역사와 같은 족보를 가진 한 국가 한 국민인데, 왜 그들을 극단적으로 증오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그들과 화해협력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간첩으로 몰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지난번 편지에 썼던 말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북한의 지령을 받지도 않았고 동조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한 간첩도 아니다. 다만 통일에 대한 나의 염원과 입장에 북한이 동조를 했다면 그건 생각해 볼 일이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겠지요. 그리고 당신도 곧 풀려나겠지요. 다만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의해 의로운 피의자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는 당신이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에 희생되는 마지막 국민이길 바랍니다. 아니 국가 보안법이 하루빨리 폐지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올바른 재판과정을 통해 당신이 무죄 석방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1.4평 독방에서 바라보는 네모조각 모양의 하늘이 아닌 당신이 좋아하는 북한산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깨끗하고 너른 하늘을 함께 볼 수 있기를 고대 합니다.
여보, 올해도 어느덧 2주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작년에는 당신과 함께 했던 크리스마스 트리장식을 어제 당신 없이 아이들과 함께 했습니다. 반짝이도 붙이고 예쁜 방울도 달고 그리고 당신과 마주앉아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했던 우리의 소망들도 함께 매달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조국, 한미 FTA 반대, 이라크 파병 반대, 공교육 정상화, ... ...
여보, 혼자서 꾸는 꿈은 한 낮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합니다. 당신과 함께 같은 꿈을 꾸며 우리에게 힘을 주는 동지들이 이렇게 많으니 곧 좋은날이 오겠지요. 그 날이 올 때까지 좀 더 힘을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면회에도 건강한 몸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아내
2006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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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
감옥에 갇힌 이정훈씨에게 부인이 보내는 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