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6일 '희망열차'에서 만난 서유희양(가명·11)은 외모에 관심이 많았다. 머리엔 보라색, 팔목엔 분홍색 리본을 묶었다. 유희양의 아버지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다. 어머니는 해고자의 아내다. 남동생까지 네 식구가 2009년 점거 파업 77일을 안팎에서 함께 겪었다.
희망열차는 쌍용차 가족대책위원회가
한진중공업 해고자 가족을 위로 방문하기 위해 조직한 행사다. 이 행사에 엄마·동생과 참여한 유희양은 쌍용차 사태를 얼마 전 배운
무신정변에 비유했다. "고려 때 무신이 싸워 이긴 뒤부터 다른 지역도 난리였대요. 쌍용차를 시작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라고 설명했다. 한진중공업과
유성기업을 예로 들었다. 유희양의 11년 삶 역시 쌍용차 사태 전후로 나뉜다.
평택에서 부산까지 무궁화호로 4시간30분이 걸렸다. 부산역에서 쌍용차 해고자 가족들을 맞이한 건 한진중공업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였다. 유성기업 가족도 왔다. 부산민주공원에서
사물놀이가 벌어졌다. 아이들 표정이 간만에 밝았다. 하지만 도경정 한진중공업 가대위 대표(32)는 "언니들이 반갑지만 쌍용차가 우리의 미래인가 생각하니 암담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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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해고 노동자 자녀 심리치유센터 '와락' 건립을 위해 고문 피해자들이 1000만원을 기증했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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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라는 걸 쌍용차 해고자 등 15명의 죽음이 말해준다. 유희양의 부모도 아직껏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이들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사연은 하나같이 구구절절하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숨결보고서'에 날것 그대로의 심경이 드러났다. 정씨는 올해 3~5월 매주 토요일 8회에 걸쳐 쌍용차 해고 노동자 8명, 배우자 6명을 대상으로 집단 심리상담을 진행했다. 상담 내용을 토대로 7월 말 보고서를 낼 예정이다.
6월27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시스코 성당에서 그 일부가 발표됐다. 상담자들의 녹취 내용을 그대로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장내가 숙연해졌다. 간간이 눈물이 번지고 자주 음성이 떨렸다. 정혜신씨는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을 겪고 있는 쌍용차 가족의 고통을 8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 △끝없이 무기력하다 △레코드판처럼 제자리에서 튀는 기억들 △내가 무능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내 고통을 모른다 △억울하고 억울하다 △시시때때로 분노가 솟구친다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정혜신씨가 가장 놀란 건 해고자와 가족들에게 죽음의 기운이 일상이라는 점이었다. 해고자 아내 김정수씨(가명)는 "남편은 소파에 있고 나는 안방에 있었는데 내내 울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옷장에서 넥타이를 꺼내서 묶고 안방 쓰레기통을 뒤집어서 그 위에 올라가 (내가) 목을 매고 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한 해고자는 요즘도 불쑥불쑥 화가 난다고 토로했다. "한번 술 먹고 몸에 휘발유를 부은 적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해고자들은 모두 가장이다. 복직 투쟁이 벌어졌던 2년간 무기력하고 무능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고역이었다. 김정길씨(가명)는 "예전엔 가장이니까 아이를 혼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못하겠어요. 그랬다가 아이가 '그럼 아빠는 뭐 하는 거야, 엄마는 돈 없다고 하는데' 그런 말 할까봐."
"단 하루라도 작업복 입고 출근했으면…" 점거 파업은 두 달 남짓이었지만, 기억은 2년간 사람들을 지배했다. 당시 상황이 레코드판 튀듯이 튄다. 정유정씨(가명)는 당시의 장면들이 자꾸 떠오른다. '애들하고 천막에 앉아서 뒤늦은 점심을 먹는데 헬리콥터가 뜨면서 모래바람이 일어 밥을 먹지도 못하고 놀란 애들을 가슴으로 감싸고 그랬던 기억들'이다.
상담에 참여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어디 가서 이 얘기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조정현씨(가명)는 "가족들한테는 얘기하고 싶어요.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면 파업 당시 너무 힘들었다, 무서웠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혹시 '거봐라. 우리가 파업 그만두고 나오랄 때 나왔으면 이렇게 고생을 안 했을 텐데 말 좀 듣지'라고 할까봐 못하겠다고 했다. 모두 마찬가지다. 점차 말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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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왼쪽)가 6월27일 쌍용차 해고자들의 집단 심리상담 결과를 일부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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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바라는 건 복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계보다는 구겨진 자존심이 아프고 억울해서다. 이소희씨(가명)는 "남편이 복직해서 단 하루라도 작업복 입고 다시 출근해야 해요. 억울해서…"라고 흐느꼈다. 조남식씨(가명)는 친구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친한 친구였는데 구사대로 들어왔어요. 복직하면 그 친구를 두들겨 패주고 사직서 쓰고 나와버려야죠"라고 말했다.
거칠더라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으로 참가자들은 조금씩 변화를 체감했다. 한 참가자는 "예전엔
경찰특공대가 곤봉으로 진압하는 사진을 정면으로 못 봤어요. 근데 얼마 전 그 사진을 정면으로 뚫어지게 봤어요. 심리치료 받은 게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내 속에 있는 상처나 두려움을 피하지 말고 좀 보자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라고 말했다.
이자영씨(38)는 현재 2차 상담에 참여하고 있다. 네 살 난 아들이 일상에서 무심코 "저걸 어떻게 죽일까"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아이에게 고통이 전이된 것 같아 남편 탓을 하게 됐다. 상담에 참여하면서 조금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정혜신씨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 자녀의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준비 중이다. "상담을 진행해보니 해고 당사자뿐만 아니라 과정을 함께 겪은 아이들의 심리적 내상도 상당했다. 본격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라고 정씨는 말했다. 해고자 자녀를 위한 심리상담센터는 처음이다.
한편 쌍용차 해고자들은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7월1일 평택을 출발해 부산 한진중공업까지 열흘 동안 걸어가는 '소금꽃 찾아 천리길'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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