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평택서 부산까지… 멈춰서는 역마다 동승 … ‘정리해고 아픔’ 한마당 어울림“안녕하세요. 희망열차입니다.”
26일 오전 8시15분 평택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 1205호 9호차. 조용하던 열차가 순간 시끌벅적해졌다. 삼삼오오 엄마 아빠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 순식간에 열차 한 칸을 점령했다. 쌍용자동차 가족 70명이 정리해고로 6개월 동안 고통을 겪고 있는 한진중공업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달려가는 ‘희망열차 85호’다. 85호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크레인 번호에서 따왔다.
“한진중공업 가족들의 심정, 아이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우리 쌍용자동차 가족들이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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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희망열차 85호’를 타고 부산을 찾은 쌍용자동차와 유성기업 노동자 가족들이 26일 부산민주공원에서 게임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
쌍용차 정직자인 이모씨는 네 살과 여섯 살 두 아들을 데리고 장모와 함께 열차에 올랐다. 이씨의 부인은 쌍용차 노조가 2009년 옥쇄파업을 벌이던 도중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을 이씨는 그래서 정리해고로 고통을 겪고 있는 한진중공업 가족들이 더 눈에 밟힌다.
쌍용차 해고자인 장준호씨와 아내 김영순씨는 아들을 데리고 열차에 올랐다. 김씨는 “쌍용자동차 파업 이후 가족들끼리 놀러간 적이 한번도 없다”며 “한진중공업 가족들을 만나러 오랜만에 가족 나들이를 나섰다”고 말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는 부쩍 예민해졌다. 파업 당시 공장을 포위한 무장경찰과 헬기를 잊지 못하는 아이는 그림도 경찰이 나오는 그림만 그린다. 한진중공업이 뭔지 잘 모른다는 아이는 “아빠 같은 해고자들이 많이 생긴 회사야”라는 장씨의 설명에 대답 대신 아빠 손을 꼬옥 잡았다.
‘희망열차 85호’는 2009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고통을 겪고 있는 쌍용차 노동자 가족이 한진중공업 노동자 가족들을 만나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치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은 이를 위해 무궁화호 열차 한 량을 통째로 빌렸다.
열차가 멈춰서는 역마다 ‘희망열차’에 함께하기 위한 사람들이 9호차를 찾았다. 천안역에서는 유성기업 노동자의 가족 6명이 열차에 올랐다. 동대구역에서는 쌍용차 아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벌이는 ‘레몬트리 공작단’ 회원이 동승했다. 두 딸과 함께 열차에 오른 백영미씨는 “함께 의지하고 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낮 12시37분. 부산역에서 ‘희망열차야 반가워!”라고 적힌 피켓을 든 한진중공업 가족 40여명이 쌍용차 가족들을 맞았다. 아빠들은 대부분 봉쇄된 영도조선소 안에서 파업을 벌이고 있어 역에 나온 이들은 대부분 엄마와 아이들이었다.
한진중공업 가족과 쌍용차 가족들은 부산민주공원 민주항쟁기념관으로 이동해 한데 어울렸다. 오랜만에 아이들은 부모 손을 잡고 강강술래도 하고 아빠 어깨에 올라 목말도 탔다. 파업 현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고 판단해 영도조선소에는 가지 않았다.
“우리 가족처럼 아빠가 정리해고된 가족들과 친구들이 우리를 보러 온다고 얘기했어요. 재미있게 같이 노는 날이 됐으면 좋겠어요.”
민주항쟁기념관에 휠체어를 탄 10살난 현서가 모습을 나타냈다. 척추가 휘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현서는 거동이 자유롭지 않아 친구들과 맘껏 노는 게 힘들다. 휠체어에서 수줍게 친구들을 관찰하던 현서가 오카리나를 꺼내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를 불기 시작하자 금세 아이들이 현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밖에서 맘껏 놀지 못하는 현서는 7살 때 엄마가 불던 오카리나 소리를 듣고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제 연주실력은 현서가 엄마보다 더 낫다. 걷는 게 힘든 현서지만 이날만은 목발을 짚고 서툰 걸음을 걸었다. 어머니 전미숙씨는 “ ‘희망의 버스’가 오던 날 너무 고맙고 가슴이 벅차서 뛰어나가고 싶었는데 함께하질 못해 오늘 비가 오는데도 현서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 가족인 김미경씨는 정신지체 2급 장애를 앓고 있는 열세살 동윤이를 데리고 민주공원을 찾았다. 김씨는 “동윤이는 어려서 잘 모르지만 중3인 큰애가 사춘기 시기에 이런 일을 겪고 너무 힘들어한다”며 “차라리 아주 어려서 자라며 잊으면 좋을 텐데…. 지금의 상처가 가슴에 많이 남을까봐 미안하다. 어른들의 문제가 아이들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 고통스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가족들이 어우러져 대동놀이를 벌이는 동안, 한진중공업 노사 교섭이 난항을 겪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잠시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곧 돌을 맞는 아들과 함께 민주공원을 찾은 한진중공업 가족 도경정씨는 “정리해고로 2년 동안 싸우고 있는 쌍용자동차 가족, 용역과 공권력의 폭력에 시달린 유성기업 가족을 보면 그것이 우리의 미래일까 두렵다”면서도 “우리에게는 여러분과 ‘희망의 버스’가 있고, 또 지켜보는 국민들의 눈이 있으니까 흔들리지 않고 힘을 내겠다”고 말했다.
‘희망열차’는 아이에게는 신나는 놀이의 장이, 어른들에게는 아픔을 공유하고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자리가 됐다. 쌍용차 가족대책위 권지영씨가 응원의 말을 건네자 한진중공업 가족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진중공업 가족들이 한 말 가운데 ‘여기서 우리가 말라 죽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라는 말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외롭고 무섭죠. 여러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함께할 거예요. 여러분이 외롭지 않게, 말라 죽지 않게 응원하면서 저희도 꼭 이기겠습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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